티스토리 뷰

 

서평을 많이 쓰다 보면 누구나 인용의 유혹에 시달린다. 좋은 문구를 보면 그대로 옮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특히, 서평이 잘 안 풀릴 때, 글 쓰는 게 귀찮아질 때 이 증상이 심화된다. “아... 인용만으로 서평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몽상에 빠지기도 한다.


한 예로, 책을 좋아하는 Y양의 블로그엔 인용구가 즐비하다. 직접 쓴 글은 거의 없다.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책 속 내용뿐이다. 운영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심심한 블로그다. 참고로, Y양은 비범한 글쓰기 실력을 갖고 있다. 시와 소설에서 문학상을 수상한 적도 있다.


이런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담지 않고 인용만 하는 이유는 뭘까.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쓴 글을 보면 지워버리고 싶어요. 마음에 안 들어서.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결국, 인용을 하게 돼요. 내 생각을 담은 문장을 보면 작가와 사랑에 빠지기도 해요. 점점 내 생각을 쓰는 게 힘들어져요.”


인용의 유혹에 빠진 그녀의 글쓰기는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 인용은 글 쓰는 사람에게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잘 쓴 인용은 글의 묘미를 살려주지만, 습관적으로 쓰다보면 창작의 방해물로 전락할 수 있다.


서평 하나에 2/3 이상이 인용이라면, 서평자의 생각으로 쓴 글인지 의구심이 들게 마련. 여러 문구를 짜깁기 한 인상을 준다면 좋은 서평이라 할 수 없다.


온라인 서점을 보면 인용이 A4 1/2 이상을 넘어가는 리뷰를 보게 된다. 그런 문단을 서너 개쯤 이어놓은 사람도 있다. 모두 독자를 고려하지 않은 글쓰기다. 내 생각, 내 감정에 빠지다 보면 이렇듯 과한 인용을 쓰게 된다.


물론, 인용을 아예 쓰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인용은 알찬 서평을 이루는 요소 중 하나다. 인용 없는 서평은 허전한 느낌을 줄 수도 있고, 독후감이나 칼럼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인용이 나쁘기만 한 걸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글쓴이의 생각과 주장만으로 채워진 글은 지루할 뿐 더러 설득력이 떨어지기 십상이다. 인용은 이 같은 위험을 막아주는 좋은 방파제다. 적절한 인용은 가독성을 높이고, 필자의 생각을 보완해주기도 한다. 문제는 습관이다. 인용을 습관처럼 쓰다보면, 베끼는 데만 익숙해 질 뿐 문장력은 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용의 적정 분량은 어느 정도 될까? 다음 기준을 고려해보자.


▲ 전체 서평의 1/3 이상을 넘기지 않는다.

▲ 한 단락은 4-5줄을 넘지 않는다.

▲ 주제와 부합되어야 한다.

▲ 문맥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야 한다.

▲ 책에 호기심을 갖게 해야 한다.


특히, 세 번째 항목 ‘주제와 부합되는 인용’은 모든 장르의 글쓰기에 적용된다. 이제 인용 사례를 보자.

 
어떤 진보인가?

<아내가 결혼했다>에서 한 여자가 두 남자와 결혼했다면, 이 소설에서는 세(!) 여자가 한 남자를 ‘공유’한다. 일단 둘에서 셋으로의 양적 진화다. 게다가 <아내가 결혼했다>의 남편이 아내의 일처다부제를 마지못해 따르는 데 비해 여기서 주인공을 비롯한 세 여자는 자발적으로 “한 남자를 사랑하는 세 여자의 동호회”(158쪽)를 결성한다. “그녀들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 세상 누구도 알 수 없는 내 후미진 내부를 충분히 나누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235쪽)


2007년 6월 한겨레에 실린 소설 <걸 프렌즈>(민음사)에 대한 서평이다. 책의 함량을 평가하기 위해 진보와 퇴보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는데, 그 방법이 독특하다. 기자의 생각이 아닌, 주요 대목을 인용한 것이다. 158쪽, 235쪽 두 대목의 인용만으로 이 소설이 가진 ‘진보적인 발상’을 명쾌하게 드러냈다. 그렇다면 ‘퇴보’적 측면은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그런데 왜 퇴보인가?

 “지금이 조선 시대도 아니고…”(199쪽). 한 남자를 다른 여자들과 공유해야 하는 데 대해 주인공이 회의와 불만을 표하는 대목이다. 다소 악의적으로 말하자면, <걸프렌즈>의 상황이란 조선 시대를 그리워하는 가부장적 남성들의 이상향이라 할 수도 있다.

199쪽의 한 대목을 인용하며, 소설의 퇴보적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짧지만, 인상적인 인용이다. 하지만 서평자의 생각에 ‘꼭 맞는’ 인용을 찾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 책장을 접거나 메모를 하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이다. 서평을 쓰기 위해 읽는 것은 아니나, 보는 순간 ‘번쩍’ 하는 느낌이 든 대목이라면 표시해두는 것이 유용하다. 기록장에 메모를 해두거나, 파일로 만들어 저장해두는 것도 좋다.

 

이 때, 파일명은 책제목으로 해야 자료를 찾기 쉽다. 이렇게 모은 자료는 서평은 물론 칼럼, 기사, 책을 쓸 때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이런 인용구들은 해당 책에 대한 서평 뿐 아니라 비슷한 주제의 책, 상반되는 책의 서평에서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인용구를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또 있다. 바로 위치의 문제다. 글을 시작하는 도입부에 쓴다면 한눈에 이목을 끌만한 내용이라면 더욱 좋다. 중간에 쓰고 싶다면, 전체 맥락을 방해하진 않는지 살펴야 한다. 공들여 써놓은 글이 느닷없는 인용구의 출현으로 흐름이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마지막에 쓰는 인용은 여운을 주면 좋다. 작가의 목소리를 마지막에 배치하는 방식이다.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인용도 좋다. 사회, 정치 분야의 책이라면 저자의 도발적인 목소리를 방점처럼 찍는다. 이런 글은 독자에게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덧글 하나라도 달게 만드는 숙제인 셈이다.

- 김민영(bookworm@rws.kr) -


댓글
댓글쓰기 폼